본문 바로 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으로 세상에 맞서다. 대한제국 최초 검사 이준의 정면 도전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직에 있던 이준은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내각을 수립하자 이를 사직하고 상경하여, 이듬해인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법관양성소에 입학한다. 이어 1회 졸업생으로 학업을 마치니, 이준은 구한말 조정이 육성한 최초의 근대 법조인인 셈이다.
그러나 구한 말 고종의 밀령을 받고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위해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된 이준이 대한제국의 검사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검사로서의 이준의 삶은 비록 짧았으나 현재까지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명명백백 시비를 가려내 기필코 비리와 부패를 척결하고자 했던 이준의 강직한 성품은 당시 고위직 관리들과 번번이 마찰을 빚었고 결국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두 차례나 검사직을 박탈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검사직에 있는 동안에도 항명죄로 고소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던 이준은 부당함에 맞서는 거침없는 행보로 순탄치 않은 검사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법치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지사형 법률가 의 모습은 오늘날까지 법조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법률가로서 이준의 기개와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는 여러 가지가 있다.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법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준은 임명 33일 만에 면관을 당한다. 대소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어떠한 고위층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단호하고 일관되게 부패한 고위관직들과 정치협잡배들을 처벌하려다 당시 권세가들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이후 반일제 구국활동에 전념하던 이준은 대한제국 최고 사법기관 평리원에 검사로 재임용된다. 이준은 임관 초기부터 당시 누구도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던 권세가 풍양 조씨와 남양 홍씨 사이의 산송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고종의 신임을 얻는다.


이준은 그로부터 한 달 뒤, 특별법원의 검사로 임명되어 고종의 인척인 이재규 사건을 맡게 된다. 이준은 타고난 강직함으로 황족이라고 죄를 덜해 주는 것 없이 징역 10년형을 구형함으로써 신분고하에 흔들리지 않는 법조인으로서의 신념을 보여준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이준의 검사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로 작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황태자의 혼례를 앞두고 고종황제가 은사령(특별사면)을 내리자, 법부에서는 이준에게 은사 대상자 명단을 전달하며 명단대로 은사안을 작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준은 은사안 작성이 국법상 검사의 고유 권한임을 이유로 법부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법부에서는 이준이 작성한 은사안의 명단을 변경하여 황제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반발한 이준은 1907년 2월 법부 형사국장 김낙헌을 고소한다. 법부는 부하가 상관을 고소하였다는 이유로 이준을 체포하지만, 이준을 석방하라는 애국계몽단체 회원들과 국민들의 요구가 쇄도함에 따라 3일 만에 이준은 보석 석방된다. 이준의 이러한 행위는 당시 사법사상 쾌거로 여겨졌다. 한 달 후, 헌병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재판장에 선 이준은 태100에 처하는 판결을 받고 아래와 같이 항변한다.

이준의 판결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자, 고종은 특명을 내려 이준의 형을 태70으로 감하고 면관만큼은 피할 수 있도록 조처한다. 그러나 이준은 뜻을 굽히지 않고 석방이 되자마자 이번에는 법무대신과 평리원 재판장 이하 관리들 모두의 면직과 처벌을 청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결국 이준은 면관을 피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불굴의 강직함을 보여준 이준은 이후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로 발탁, 막중한 소명의식을 품고 구국의 대장정에 오른다.

※ 참고문헌 : <이준열사, 그 멀고 외로운 여정> , (사)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